SPQR, Mary Beard, 2015
01/03/2021
1.SPQR, Mary Beard, Profile Books, 2015, 70쪽
Eat Me, Bill Schutt, Wellcome collection, 2017, 76쪽
2.
SPQR: 보다 확실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즈음엔 로마가 공공시설들을 갖춘 도시형 공동체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그보다 한참 이전의 가장 오래된 사료들을 들추어볼 경우, 청동기 시대 중기쯤(기원전 1700년~1300년)에도 어떤 부족들이 이 지역을 '거쳐가기만 한게 아니라', 터를 잡고 살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사료들이 충분히 있다. 이 두 시기 사이에서 더 큰 마을들이 생겨나, (무덤에 남겨진 유물들로 추론할 때) 부유한 소수 가문들이 생겨나면서 더 큰 마을들이 생겼고, 추후에 이를 중심으로 단일공동체로 결집해 도시화된 것으로 보인다.
Eat Me: 고고학에선 "죽은 사람들이 산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해준다".
'고고학의 어려움은 특정 장소를 발굴할 때 두 개의 시간축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범죄현장에 출동한 경찰이라면 현장증거를 보존하기 위해 노란테이프를 둘러 외부간섭을 방지할 수 있겠지만, 고고학적 사료는 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긴 세월에 걸쳐 변모를 겪는다. 동굴안에 모닥불을 피우는 장소가 있었고, 3살짜리 아이의 뼈가 모닥불 옆의 구덩이에서 사슴뼈와 함께 발견되었다고 하자. 모닥불 옆의 구덩이는 대개 식사 후 잔여물들을 버리는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3살짜리 아이의 뼈는 식인행위의 흔적인가? 아닐 수도 있다. 동굴 안에 홍수로 인해 물이 들어차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3살짜리 아이가 죽었고, 물이 빠져나가면서 그 구덩이에 갇혔을 수도 있다. 또는, 다른 퇴적층에 갇혀있던 화석이 지각변동으로 인해 그 아래의 퇴적층으로 이동했을 수도 있다.
뼈에서 살점을 발라내기 위한 칼질이나 골수를 빼기 위한 둔기질의 흔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흔적이 아니라면 근처의 나무나 돌무더기에 깔렸을 때 생긴 자국과 분간하기 어려울 수도 있어 현장은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다른 설명을 야기한다.
4. 로마의 초창기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전에 읽은 동족포식(식인을 포함한 cannibalism)에 대한 책이 떠올라 두번째로 인용했다. 로마인들이 식인행위를 했다는 것이 아니라, 고고학적 관점에서 로마인들의 기원을 찾는 과정에서 로마인들은 정말 Aeneas이건 Romulus&Remus이건 상관없이 떠돌이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었다는 게 결론이다.
로마인들은 "그 기원에서부터 도둑질이 상존했으며, 그들이 가진 집, 그륻의 아내들, 토지, 제국 전부를 통틀어 도둑질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Sallust의 (편지 형식을 차용한) 설명이 "아하, 그렇구나! 도둑놈들이군!"이란 생각과 함께 머리속에서 정리되었다.